모형 취미생활


얼마전 회사 사보에 실었던 글입니다.
혹시 차후에 못보게 될까봐 옮겨봅니다.. ^^


얼마 전, 외근 중에 불쑥 날아온 메일 한 통으로 인해 깊은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바로 사보팀에서 '특이하고 재미난 취미'를 가진 사람을 소개하려 하니 글을 써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처럼 평범하고 어중간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런 원고 청탁이 들어온단 말인가?'
'이거 글 한번 잘못 쓰면 1년치 놀림거리가 될 수도 있겠는데?'
하여튼 이런저런 불안한 심정은 있었지만, 이 한몸 폐인으로 낙인 찍혀 사우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이 또한 나쁘지 않을 듯하기에 맘을 고쳐먹고 제 취미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일단 과거사부터 들추자면...
어렸을 적부터 주로 프라모델, 종이모형, 비디오 게임을 좋아했습니다. 학기중에는 오락실에서 살다시피 했었고, 방학 중에는 1달 이상 방안에만 틀어 박혀 모형 만들기만 하던 적도 많았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진정 히키코모리 수준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만큼 열정도 대단했고 집중력도 좋았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제 인생에도 큰 역경이 있었으니…

바로 제가 군대간 사이에 어머니가 모든 모형들을 폐기처분 하셨던 사건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분서갱유 이후의 최대의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죠. 그만큼 당시에는 모형이라는 것이 단순히 장난감으로 치부되고 모델러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철 없는 놈으로 무언의 압박과 무시를 당해왔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하며 자취를 시작하면서, 자유로운 생활 속에서 감춰진 욕망은 더 이상 존경 받는 지킬 박사의 가면을 벗고 하이드가 되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마구 질러대는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거죠.

그때 처음 구매한 피규어는 당시 playstation 게임으로 한참 불타올라 있었던 'Metal Gear Solid'의 캐릭터 피규어였습니다. 무려 24개의 박스를 처음 받았을 때의 감동이란 대단한 것이었죠.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형제작에 장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인티큐브의 전신인 로커스로 입사하게 되면서 새로운 취미에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회사가 위치한 코엑스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은 관계로 팬시류의 가게들이 많았고 그런 가게마다 피규어 자판기(가샤폰, 동전을 넣고 뽑는 작은 모형)가 하나씩 있었습니다. 매일 하나씩 뽑다 보니 피규어라는 세계도 폭넓게 알게 되고 그 매력에 푹 빠져 버린 거죠.

그러다가 회사가 을지로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불에 기름을 끼얹게 됩니다. 당시 피규어의 메카는 명동이었기 때문이죠. 지금은 강남권으로 피규어 매장이 집중되어 있지만, 그때만 해도 대략 10개 정도의 피규어 매장이 명동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뭐.. 이 정도가 제가 피규어를 모으게 된 계기입니다. 평소에 게임, 애니메이션을 좋아했기에 이러한 것들을 캐릭터화한 피규어로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렸을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 보니 회사의 지리적 여건도 조금은 작용한 듯합니다.

지금까지 읽으신 분들은 '피규어'가 뭔지 대략 감이 오셨으리라 생각됩니다. '피규어'의 정의가 모호하고 광범위하긴 하지만, 입체 조형물을 뜻하는 Figure의 일본식 발음으로 주로 캐릭터나 로봇 등의 모형을 뜻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확한 표기로는 '피겨'가 맞겠지만 일반적으로는 '피규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서구권에서는 Figure라 하면 '사람의 형태를 본뜬 것'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로 통용됩니다. 하지만 트랜스포머 저작권자로 유명한 미국 완구사인 'Hasbro'에서 남자아이용 인형인 G.I.Joe 를 여자아이들의 인형인 Doll과 구분하기 위해 Action Figure 라는 용어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캐릭터의 천국인 일본에서는 피규어와 관련된 크고 작은 페스티벌이 수십 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원더 페스티벌(원페), Cultural Convention of Caracters(C3), 월드 하비 페스티벌(WHF)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페스티벌을 통해 '애니메이션 피규어' 라는 용어가 통용되었고, 현재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입체화 혹은 작은 입체물을 나타내는 말로 혼용되기도 합니다.

종류로는 장르별, 소재 별, 발매형태별, 가동 유무 별 등에 따라 굉장히 많은 분류법이 있지만
「PVC, 가샤폰, 식품완구, 트레이딩, 큐브릭, 키홀더, 초합금, 레진, 콜드캐스트, 버스트, 소프트비닐, 구체관절, 블럭, 다이캐스트, 레플리카, 미니어처」등으로 분류할 수도 있을듯합니다. 요즘은 '플랫폼 토이'라는 예술적 장르의 피규어들에 샤넬, 폴스미스, 프라다, 펜디, 나이키 같은 업체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취미를 접하면서 느낀 안타까운 현실은 피규어를 수집하거나 제페니메이션(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즐겨본다는 이유로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의 '오타쿠'로 칭하며 별스럽게 치부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본에서도 피규어 매니아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키덜트(kidult=kid+adult)'라는 신조어가 생기면서 철이 덜 든 어른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일례로 얼마 전 금메달리스트 박태환이 피규어를 모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인터넷에서는 이를 비난하고 옹호하는 설전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비판론자들이 어렸을 적 열광하였던 비닐 소재의 태권V 로봇과 바비인형도 피규어의 한 축이기에 자승자박하는 모양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타인의 취향에 대해서는 true/false로 대변되는 진실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만 명에겐 만 개의 취향이 있습니다. 비록 폐품을 수집하고, 길고양이를 쫓아다닌다고 해도 본인에게는 이것이 천상의 아름다움일 수 있습니다. 가장 천박한 취향이란 고전음악을 듣는 사람도 대중음악을 듣는 사람도 아닌, 고전음악을 들으며 대중음악을 듣는 사람을 경멸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저에게 왜 피규어를 모으냐고 또 물으신다면 저는 그냥 한마디로 일축해 버릴 겁니다.
"취향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요상한 취미를 너그럽게 이해해 주신 아내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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